부사 李 晉+戈 隆慶 丁卯 來로 되어 있습니다. 융경은 목종 융경제의 연호로 융경제 정묘년은 1567년입니다.
족보에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왕조실록에는 전하지 않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ma_12202029_001
명종실록 명종 22년 2월 29일자 기사에 乙卯/以李鐸爲知中樞府事, 許世麟爲咸鏡北道兵馬節度使, 李戩爲全羅道兵馬節度使, 徐崶爲慶尙右道水軍節度使, 朴大立 【敦睦宗族, 不事營産。 凡待人接物, 皆致其厚。】 爲僉知中樞府事, 李友閔 【性似開明。 然不能遠迹於權要, 惟便身圖, 苟保爵祿, 罷軟之甚, 何足取哉?】 爲黃海道觀察使。라 하여 이전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567년에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된 뒤에 그로부터 수개월 뒤에 회령부사로 부임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북관지 회령부 부분의 23페이지를 보면
판관 역임자들 명단 중에 申興禮, 李宗顯(세조대의 사람) 그 다음에 金OO, 李晉+戈, 林亨秀 申顯 이렇게 등장합니다.
임형수(林亨秀) 文 嘉靖 己亥 홍문관교리來
15세 이전이 임형수가 회령판관으로 부임하기 전에 회령판관을 역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15세 이전이 언제 회령판관으로 부임했는지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임형수가 회령판관으로 임명된 기사가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 7월 12일 두번째 기사에 나타나는데, 부임되자마자 바로 체직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중종 34년 7월 12일자 첫번째 기사를 보면 회령 판관(會寧判官)을 가려서 선출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고, 그 앞에 전운사는 조처할 일이 많아 소임이 가볍지 않으니 모름지기 재간이 있는 재상을 선발하여 위임해야 합니다. 지금 한윤창(韓胤昌)은 변방 일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재능도 부족하여 결코 임무를 감당하기 어려우니 체직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당시 한윤창은 이미 전라도관찰사와 강원도관찰사라는 직책을 지낸 인물로서 회령 판관은 아닙니다.
임형수가 회령 판관에 임명되었다가 갈린 것은 1539년(중종 34년) 7월 12일이고, 그 전에 회령판관 후보자를 중종이 낙점한 것도 같은 날입니다.